본문 바로가기
국내 및 해외여행기/2017년도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

by 전태공 2017. 11. 26.

강진 다산초당(茶山草堂)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자락에 숨어있는 다산초당을 찾아 나선다.

귤동마을에 차를 세우고 다산초당으로 이어진 산길로 올라선다.

 

 

 

 

다산초당은 마을에서 산자락 오솔길로 10여분을 걸어 올라야 만날 수 있다.

 

 

[다산초당 약도]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편백나무들로 가득하다.

한낮인데도 어둑어둑할 정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다산초당 가는길]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산새소리들이 요한슈트라우스 왈츠곡처럼 감미롭다.

조심스레 나를 따라오는 내 발자국소리에 떠밀려 고요히 산길을 걷는다.

 

 

 

 

먼 옛날~ 다산 정약용선생께서도 이처럼 적막한 산길을 오르셨겠지~

 

시간을 200여 년 전으로 잠시 되돌려 놓았을 무렵~ 뿌리길이 나타난다.

온갖 나무뿌리들이 울근불근 성난 핏줄처럼 온통 길위로 솟아있다.

 

 

[뿌리길]

 

 

뿌리길이라고 명명된 구간이다.

길 옆에 "뿌리의 길"이라는 정호승시인의 시(詩) 하나가 세워져 있다.

 

뿌리의 길 - 정호승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가다가 알았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

 

지상의 바람과 햇볕이 간혹

어머니처럼 다정하게 치맛자락을 거머쥐고

뿌리의 눈물을 훔쳐준다는 것을

 

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어린 아들과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을 오르며

나도 눈물을 닦고

지상의 뿌리가 되어 눕는다

 

산을 움켜쥐고

지상의 뿌리가 가야 할

길이 되어 눕는다.

 

 

 

 

울퉁불퉁한 돌길이 깔닥고개처럼 가파르다.

 

 

 

 

깔닥고개 끝자락 쯤에서  암자처럼 보이는 작은 건물하나가 배시시 나타난다.

다산의 제자들이 머물며 생활했다는 "서암(西庵)" 이라는 이름의 숙소다.

 

 

[서암]

 

 

다산초당엔 4채의 건물이 있다.

서암(西庵)과 다산초당(茶山草堂), 동암(東庵)과 천일각이다.

 

 

[다산초당 건물들]

 

 

서암 바로 오른쪽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서있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길러냈던 본당이다.

 

 

[다산초당]

 

 

처마 밑에 걸린 다산초당(茶山草堂)이라는 현판이 고색창연하다.

 

풀 초(草)자를 풀의 형상인 풀 초(艸)자로 쓰고

뫼 산(山)자가 거센 강풍에 휘어진 것처럼 보이는 이 현판은 추사 김정희선생의 글씨체다.

 

 

[다산초당 현판]

 

 

초당에는 조선후기 실학자의 거두, 정약용선생 초상화가 모셔져 있다.

 

다산초당이 위치한 만덕산에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호를 다산(茶山)으로 지었다는 정약용 선생은 이곳에서 10년 이상을 유배생활로 보냈다.

 

 

[다산 정약용선생 초상]

 

 

초당 앞 마당에는 작은 바위, 반석 하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차를 유난히 좋아했던 다산이 뒤뜰의 약천(藥泉) 샘에서 물을 떠다가

찻물을 끓였던 일종의 티(Tee)탁자라고 할 수 있는 부뚜막 바위, 다조(茶俎)다.

 

 

[차를 끓였던 바위 "다조"]

 

 

마당 옆에는 "연지"라는 이름의 작은 연못이 있고

연지 중앙엔 다산이 직접 주워온 돌로 쌓았다는 "석가산(石假山)"이라는 돌탑이 있다.

 

 

[연지석가산]

 

 

다산초당 뒷뜰 바위에 손수 새겼다는 "정석(丁石)"이라는 글자와 "약천"이라는 샘~

그리고 차를 끓였던 "다조(茶俎)"바위와 연못의 "석가산"돌탑이

 

바로 이곳 초당에서 볼 수 있는 네 가지 경치~ 즉 다산사경(茶山四景)으로 불린다.

 

 

 

 

초당 오른쪽으로 다산선생이 주로 거처하며 책을 집필했던 서재 "동암(東庵)"이 있다.

 

 

 

 

무너져 버린 건물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복원했다는 이곳 동암에서

다산선생께서는 목민관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와

 

나라의 제도와 법규 개혁에 관하여 논한 "경세유표'(經世遺表)" 및

형법에 관한 책 "흠흠신서(欽欽新書)"등, 50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다.

 

 

[동암]

 

 

동암을 지나 백년사로 꼬부라진 산길 옆에 작은 정자 "천일각"이 강진만을 내려다보고 있다.

 

 

[천일각]

 

 

다산이 초당에 거주할 때는 없었던 정자지만

 

당시 흑산도로 귀양간 둘째형 약전이 보고싶고 고향이 그리워질 때면 

다산이 마음을 달래던 이곳에 후세사람들이 세워준 "천일각"이라는 정자다.

 

 

[천일각에서 내려다 본 강진만]

 

 

정조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정약용선생은

순조임금이 즉위하면서 1801년 신유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사건 "신유사옥"때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로 강진으로 유배를 왔다.

 

 

 

 

강진에서 총 18년간을 보낸 유배생활 중 주막을 비롯한 몇 곳을 돌아 다니다가

결국 이곳 초당에 자리를 잡고 근 10년여를 보냈다.

 

 

 

 

이곳 초당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는 백련사라는 절이 있다.

 

백련사의 수도승, 혜장 스님과 절친한 친구가 되어 우정을 나눴던 다산선생은

자다가도 일어나 스님에게 달려갔을만큼 백련사(白蓮寺)와 혜장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다산초당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함경도부령도호부로 발령받아 부임하는 친구아들에게 지어줬다는

"송부령도호이종영부임서(送富寧都護李鍾英赴任序)"라는 다산의 글귀가 생각난다 .

 

목민관은 네 가지를 두려워해야 한다.

 

-아래로는 백성을 두려워해야 하고

-위로는 감찰기관을 두려워해야 하며

-또 그 위로는 조정(朝廷)을 두려워하고

-또 그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

 

오늘날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은 글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