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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및 해외여행기/2016년도

화성 융건릉[隆健陵] 산책

by 전태공 2016. 5. 26.

화성 융건릉[隆健陵] 산책

 

 

오랜 만에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융건릉을 찾아 나선다.
한국의 조선 왕릉 중 하나인 이 곳 융건릉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곳이다.

 

 

[융건릉 입구]

 

 

융건릉에는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 장조(莊祖)와
사도세자 부인 혜경궁 홍씨가 합장되어 있는 융릉(隆陵)과
 


[융건릉 안내도]

 

 

정조와 효의왕후가 합장되어 있는 건릉(健陵)이 함께 있는 왕릉이다.

 


 

 

융릉을 먼저 둘러보기 위해 숲길 삼거리 이정표 앞에서 우회전한다.

 

 

 

 

계절의 여왕 5월답게 숲은 초록빛 신록에 흠뻑 물들어 있다.

 


[융릉으로 가는 숲길]

 

 

찌루루~ 찌루루~
초록 숲 어디선가 이슬처럼 청아한 새소리가 들려온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온통 초록빛이고
귀에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 또한 모두 초록빛에 물들어 있는 듯 하다.

 


 

 

나들이 나온 연 초록 새싹같은 아이들이
5월의 초록세상을 더욱 더 빛내주고 있다.

 


 

 

드디어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융릉(隆陵)에 도착한다. 
 
조선 왕릉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로 능에는
영혼이 출입하는 홍살문과 제사를 모시는 정자각 및 수라간이 있다.

 

 

[융릉 홍살문]

 

 

아버지 영조에 의해 28세 나이로 뒤주 속에서 굶어죽었던 사도세자의
한스러운 영혼이 홍살문 주변을 떠돌고 있는 듯 하다.

 


 

 

사도세자의 묘는 원래 경기도 양주시 배봉산 기슭에 있었으나


왕위에 오른 아들 정조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숭한 뒤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여 현릉원(顯隆園)으로 부르다가

 

 

[제향을 올리는 정자각]

 

 

혈통상 고손자였던 대한제국의 고종임금이
고조부 장헌세자를 장조로 추숭하고 이름도 융릉으로 격상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왜 아버지에 의해 뒤주 속에서 죽게 되었을까?
복잡했던 정황이 문화해설사의 설명으로 대충 정돈이 된다.

 


 

 

지금의 정당처럼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당파싸움이 극심했던 당시~
노론에 의해 세자로 책봉된 영조가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후

 


[사도세자 부부 묘소 융릉]

 

 

영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든 노론편에 서서 소론을 배척했으나
사도세자의 정치적 입장은 아버지 영조와는 달리 소론에 동정적이었다.
 
이처럼 소론에 동정적이던 사도세자가
영조의 대리청정 등으로 정치적인 힘을 키워 나가자

 


 

 

노론의 중심세력 및 계비 정순왕후 등이 사도세자를 몰아내려고
온갖 모함을 시작하였고 평안도 유람을 다녀온 사도세자를
 
반란모의를 하고 왔다는 모함을 하면서
결국 사도세자의 비행 열 가지를 적어 영조에게 상소하자

 


[융릉 비각]

 

 

분개한 영조가 세자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명하였으나 말을 듣지 않자
 
마침내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굶어죽게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역사에서는 "임오사화" 또는 "임오화변"이라고 부른다.

 


[건릉으로 가는 숲길]

 

 

당파 싸움을 없애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했던 영조는
결국 당쟁에 휘말려 아들까지 죽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나중에 아들을 죽인 자기의 잘못을 깊이 후회한 영조는 
 
뒤늦게 아들에게 생각할 사(思)자와 슬플 도(悼)자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려 "사도세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정조임금과 그 부인이 잠들어있는 건릉을 둘러볼 차례다.

 

 

 

 

숲길을 벗어나니 사도세자의 아들인 조선 22대왕 정조부부의 묘역, 건릉이 나타난다.

 


[건릉 정자각]

 

 

뒤주에 갇힌 후,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다가
8일만에 숨을 거두었다는 사도세자~!

 


[건릉 정자각]

 

 

당시 11살의 나이로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했던 아들 정조는
조선 23대 왕으로 즉위하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 추진과 함께

 

 

[정조대왕 영정]

 

 

당쟁을 없애기 위한 탕평책을 펼치면서 신진 세력 등용 및
수원 화성 축조 등으로 왕권의 강력함을 보여주려 노력했으며

 


[건릉 홍살문]

 

 

또한 극진한 효자였던 정조는 수원성 안에 행궁을 지어 놓고
아버지의 묘소를 찾는 행차를 하며 정성을 다해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정조대왕 부부 묘소, 건릉]

 

 

역사가 살아 숨쉬는 왕릉을 산책해본다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초록빛 신록이 뿜어내는 향기만큼이나 신선한 일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