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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및 해외여행기/2010년 이전

철원 안보관광지 둘러보기 2편[도피안사, 백마고지]

by 전태공 2011. 12. 25.

철원 안보관광지 둘러보기 2편[도피안사, 백마고지]

○ 도피안사~!

무엇인가에 꽉 조임을 당하고 있는 듯한
민통선의 부자유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니 우선 마음부터 홀가분해졌다.





통제받지 않은 자유스러움이 이렇게나 귀한 것일까?



[도피안사 사천왕상]


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유(自由)라는 것에 대한 소중함이 새삼스럽게 다시 느껴졌다.



[도피안사 사천왕상 2]


민통선을 벗어나자마자 도피안사부터 찾아갔다.
국도에서 조금 좌회전해 들어간 야산 밑에 도피안사가 숨어있었다.



[해탈문]


통일신라 때 도선국사라는 분이 창건했다는 설명문을 보니
도피안사는 생각보다 유서 깊은 천년고찰이었다.



[느티나무와 대적광전]


쭈삣거리는 마음으로 사천왕문을 지나 해탈문을 통과하자
거대한 느티나무가 나타났고 바로 그 옆에 범종루가 서있었다.



[범종루]


범종루 건너편에는 대웅전에 해당하는 대적광전이 서있었고
마당 중앙에는 국보급 돌탑이라는 자그마한 3층 석탑 하나가 서있었다.



[도피안사 대적광전과 삼층석탑]


전설에 따르면 도선국사가 철제 "비로자나불" 좌상을 만들어
철원 안양사에 봉안하기 위해 운반하던 도중 갑자기 불상이 사라져



[설법전]


사방팔방으로 찾아본 결과 이곳 화개산 자락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일로 철조 불상이 영원한 안식처 피안을 찾아온 곳이라 하여



[대적광전]


바로 이 곳 화개산에 도피안사를 창건하고
삼층 석탑과 철조 비로자나불 좌상을 봉안하였다고 한다.



[삼성각]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새로운 양식이었다는 비로자나불 좌상은
섬세한 조형수법과 조화된 신체 비례를 가진 뛰어난 작품이라는데





그런 전설이 깃든 "비로자나불" 좌상을 꼭 구경하고 싶었으나
아뿔사~ 대적광전 문이 닫혀있어 아쉽게도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도피안사 삼층석탑]


8·15광복 후 공산치하에 들어갔던 도피안사는
6·25전쟁 때 완전 불타 버렸던 것을 육군에서 다시 재건하여





지금은 불교신자 군 장병을 위한 군찰(軍刹)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 근대문화 노동당사~!

도피안사를 뒤로 하고 백마고지 전적지를 향해 달리다가 만난
노동당사를 다시 한번 둘러보기로 했다.



[노동당사]


기둥과 벽에 무수하게 나있는 총알자국들 ~!
여기저기 포격에 맞아 뻥 뚫려있는 포탄구멍들 ~!





3층과 2층은 무너져 내려 앙상하게 외벽만 남아 있고
1층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역시 간신히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건물 ~!





유골마냥 앙상한 골격만 남아있는 노동당사는
곳곳에 깊은 상처를 간직하고 전쟁의 참혹성을 그대로 증언하고 있었다.



[총알자국들...]


이 노동당사는 38선 이북이 공산치하에 있던 5년 동안
철원 김화 평강 일대를 다스리던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사용되던 건물이라는데



[총알자국들...2]


6.25 전쟁 휴전이 되면서 우리 땅으로 수복되어
지금은 근대 문화유산 등록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금방이라도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올 것같은 분위기 속에서
분단의 비극을 절규하고 있는 노동당사를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 백마고지 전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 백마고지 전적지

백마고지 전적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경이었다.
백마고지 전적지 입구에는 백마고지 전승비가 세워져 있었다.



[백마고지 전승비]


"1951.10.7~10.15까지 중공군과의 1,2차례 공방전 끝에 대승을 거둠으로서
누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조국을 구하고 살신보국한 영령들이 잠든 곳이다.

1994.10.13 백마부대 장병 일동"



[백마고지가 조망되는 팔각정]


전적지로 오르는 언덕에는 살을 에는 듯한 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백마고지가 조망되는 작은 야산 정상에는 팔각정 하나가 세워져 있었고 멀리 백마고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좌측으로 보이는 산이 백마고지]


이곳을 누가 차지하느냐에 따라
철의 삼각지 주인이 바뀌어 버린다는 군사적 요충지, 백마고지~!





그 백마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1951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치러진
중공군 2개사단과의 14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적 14,000명을 사상시키고 백마고지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우리 측도 수천 명이 사상을 당했다고 한다.



[백마고지 전투전적비]


처절했던 백마고지 전투에서 해발 395m에 불과한 고지 정상에
약 30만발의 포탄 비가 쏟아져



[백마고지 전적지 기념탑]


포탄으로 하얗게 벗어진 산정상의 모습이
마치 백마가 누운 형상처럼 보였다고 하여 백마고지가 되었다고 한다.

전적지를 내려오면서 만난 모윤숙 시인의 "백마의 얼" 시비에는
치열했던 그 날의 백마고지 전투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었다.



[백마의 얼]


"풀섶에 누워 그 날을 본다.
하늘이 울리고 땅이 갈라지듯 적들이 몰려오는 저 산과 강에서

우리는 끓는 피로 용솟음치며 넘어지려는 조국을 감쌌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