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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및 해외여행기/2018년도

충주 탄금대와 중앙탑

by 전태공 2018. 11. 7.

 
충주 탄금대와 중앙탑 

 

탄금대

 

 

괴산 쪽에서 흘러 내려온 달천이 남한강과 합류되는 곳에 자리한~
해발 108m의 나지막한 산, 대문산에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는 탄금대(彈琴臺)가 있다. 
 
 

 
 
탄금대 역사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물론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이지만
두 번째 인물은 탄금대공원 초입에 순국비로 세워진 임진왜란의 패장, 충장공 신립장군이다. 
 
 

[충장공 신립장군 순국비]

 
 
임진왜란 당시 남한강변에 배수진을 치고 수만 명의 왜군들과 맞붙어 싸웠던 신립장군은
결국 중과부족으로 8,000여명의 군졸들과 함께 바로 이곳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천추의 한을 품고 있을 신립장군 순국비를 지나 감자꽃노래비 앞에 선다.
 
이곳 충주에서 태어난 항일 시인 "권태응" 선생이
일제의 창씨개명에 맞서서 지었다는 "감자꽃"이라는 동요다.
 
『 자주 꽃 핀건 자주 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 감자
   하얀 꽃 핀건 하얀 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 감자 』 
 
 

[감자꽃 노래비]

 
 
감자꽃노래비를 지나 탄금대공원을 가로지른 중원문화길로 들어선다.
파란 하늘아래 거울처럼 잔잔한 탄금호수가 수정처럼 맑다. 
 
 

 
 
울창한 소나무 숲을 따라 열두대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휘늘어진 낙락장송 노송 가지들이 만들어 놓은 푸른 숲 그늘이 싱그럽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 선생이 비문을 썼다는 탄금대비가 나타난다.
 
이 비에는 충주의 연혁과 함께 남한산성 전투의 승장 김윤후 장군의 행적과
악성 우륵, 임진왜란 때 원통하게 순국한 신립장군의 충절심 등에 관한 내용들이 담겨 있다. 
 
 

[탄금대비]

 
 
탄금대비 바로 앞에 탄금정이라는 작은 정자가 열두대 입구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탄금정]

 
 
탄금정 주변에 펼쳐진 파노라마 풍경 속, 소나무 숲이 한 폭의 산수화같다. 
 
 

 
 
탄금정에서 열두대라는 이름의 남한강변 기암절벽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선다.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왜군들과 싸웠던 신립장군이
뜨거워진 활 줄을 물에 식히기 위해 높이가 약 30미터나 되는 이 절벽을
 
12번이나 오르내리면서 병사들을 독려했다 하여 열두대라고 불리는 곳이다. 
 
 

 
 
한양으로 가는 관문으로 최고의 요새였던 조령을 버리고
죽을 각오로 탄금대에 배수진을 친 후, 싸움에 임했던 신립장군~
 
이 암벽을 열두 번이나 오르내리며 뜨거워진 활의 열기를 식히면서
처절하게 싸웠지만 결국 패하게 된 신립장군이 얼마나 황망해 했을까? 
 
 

[열두대]

 
 
역사적인 패전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열두대 아래 남한강은
저 아래 "용섬"을 휘돌며 그저 말없이 흘러가고 있다. 
 
 

 
 
멀리 세 개의 아치를 머리에 이고 있는 탄금대교가 보이고
탄금대교 너머로 건설된 우륵대교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음악의 성인으로 부를 정도로 뛰어난 음악가를 뜻하는 악성(樂聖)~
 
거문고를 만든 고구려의 "왕산악"과 조선 세종임금 때, 편경을 만들고 아악을 정비한 "박연"...
가야사람으로 신라에 귀의한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을 우리나라의 3대 악성으로 부른다.
 
3대 악성 중의 한 사람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하던 곳이라 그럴까?
스쳐가는 바람소리까지도 은은한 가야금 소리가 되어 귀에 스며온다. 
 
 

 
 

○ 탑평리 칠층석탑

 


탄금대를 나와 이번에는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에 있는

국보 제6호 "탑평리 칠층석탑"을 찾아 나서본다. 
 
 



[탑평리 칠층석탑]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에 자리한 이곳 충주지역은
병기 제작에 필수적인 철까지 많이 생산되는 전략적 요충지라서
 
신라, 고구려, 백제가 서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세력 다툼을 벌렸다. 
 
 

 
 
그런 연유로 이곳 충주지역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의 삼국 문화가 골고루 남아 있다.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에는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고구려 석비가
충주 고구려비 전시관에 보관되어 있고 
 
 

 
 
바로 이곳 탑평리에 현존하는 통일신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큰
높이 14.5m의 "탑평리 칠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3층 양식과는 달리 2중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이 올려진
이 탑은 신라 원성왕 12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칠층석탑의 지리적 위치가 우리나라 중앙부에 해당한다고 하여 중앙탑으로도 부른다. 
 
 

 
 
전해지는 설화에 따르면 신라 제38대 원성왕이 국토의 중앙 지점을 알아보기 위해
보폭과 걷는 속도가 비슷한 장정 두 사람을 한 날, 한시에 영토 남북 끝 지점에서 출발시킨 결과
 
두 사람이 만난 장소가 바로 이곳 충주시 탑평리였고
그 지점에 오늘날 중앙탑(中央塔)으로 불리는 칠층석탑을 세웠다고 한다. 
 
 

 
 
중앙탑면에 "안반내"라는 지명이 있다는데 여기서 반내라는 것은
남북 끝에서 딱 절반이 되는 곳에 있는 내(川)를 가리킨다고 하며 
 
한국의 반, 곧 중앙을 뜻하는 "한반내"라고 이름지었다고 전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