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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공의 글사랑/공모전 입상, 투고

역사의 탁류 속에 우뚝 서 있는 승일교[근대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 입선작]

by 전태공 2011. 12. 21.


역사의 탁류 속에 우뚝 서 있는 승일교

"태봉"국을 염원하던 "궁예" 왕의 못다 이룬 꿈이 기암절벽 협곡 사이에 한탄의 강이 되어 흐르는 철원땅에는 수 많은 역사의 전설들도 도란도란 함께 흐르고 있다.

골골마다 스며있는 역사의 애환들이 아름다운 자연과 공존하고 있는 철원에는 그래서 그런지 볼거리도 많고 숨어있는 이야기거리들도 많다. 삼부연폭포, 직탕폭포, 순담계곡 고석정 등 빼어난 자연의 명소와 함께 백마고지, 제2땅굴, 월정리역, 승리전망대 등의 안보관광지들이 어우러져 있고 북한 노동당사, 승일교 등 근대문화유산까지 더해주고 있는 철원땅은 정말 다양한 테마의 볼거리로 넘쳐 나는 곳이다.





8월 초순, 며칠 간의 여름 휴가를 철원땅에서 보내기 위해 집을 나섰다. 6.25전쟁 당시 김화, 평강과 함께 철의 삼각지를 이루며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백마고지 전적지와 직탕폭포와 승일교도 둘러보고 내친 김에 한탄강 여울을 타고 순담계곡과 고석정 등 한국의 그랜드캐년 협곡을 레프팅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마철이 끝났다는 일기예보에 화창한 날씨를 기대하며 나섰던 여름휴가는 그러나 예고없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게릴라성 집중호우때문에 출발부터 수중전을 치러야 했다. 파주 적성을 지나 연천 전곡을 지날 무렵, 비는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센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쳐 왔다.





이런 기세로 집중호우가 쏟아지고 나면 한탄강은 금방 거센 탁류로 변하고 말텐데 철원에 도착한다고 해도 과연 한탄강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수나 있을까? 마음은 노심초사하고 있었지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를 어찌할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빗 속을 뚫고 얼마쯤이나 달렸을까? 전곡을 빠져 나온 한적한 지방도로가 포천에서 달려온 43번 국도 위로 올라탈 무렵 다행히 비는 스물스물 멈추어주기 시작했다.

비가 갠 하늘엔 솜사탕 같은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제일 먼저 둘러보기로 한 승일교 방향을 향해 신철원을 숨가쁘게 지나쳐 463번 지방도로를 올라타니 고석정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하얀 구름조각이 걸터앉아 있는 산 봉우리들의 영접을 받으며 휘돌아가니 드디어 주황색 아치를 머리에 인 한탄대교가 눈 앞에 불쑥 나타나 주었다.





근대문화유산 제 26호로 지정되었다는 승일교는 한탄대교 바로 옆, 한탄강의 거센 탁류 속에 발을 담근 채 우뚝 서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승일교 주변 한탄강은 시뻘건 황톳빛 여울이 되어 으르렁으르렁 용트림을 하고 있었다.

천군만마 말발굽이 일으키는 흙 먼지처럼 뽀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경천동지의 몸짓으로 소용돌이쳐 흐르는 한탄강은 노도와도 같았다. 한탄강의 거센 여울은 오른쪽,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와 왼쪽, 철원군 갈말읍 문혜리를 깊은 협곡으로 갈라놓고 있었고 그렇게 갈라놓은 두 지역을 승일교가 다시 절묘하게 이어주고 있었다.





근대토목유산의 대표작이라는 승일교~! 한탄강을 가로지른 길이 136m에 폭이 7.5m 그리고 높이가 21m라는 승일교에는 전해져 오는 이야기도 많았다.

한국의 "콰이강의 다리"로도 불리는 승일교는 먼저 남북한이 시차를 두고 완성한 남북합작의 다리라는 설을 가지고 있다. 6.25 전쟁 전, 이 곳이 38선 이북 북한 땅이었을 때 북한에서 공사를 하다가 중단된 것을 휴전이후 한국 정부에서 완성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승(承)"자와 김일성의 "일(日)"자를 합쳐 승일교(承日橋)라고 이름 붙여졌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이 승일교가 놓인 곳은 원래 한탄강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자리로서 옛날에는 돌다리를 놓아 건너던 곳이었다는데 북한정권 시절, 이 곳에 군사도로를 만들기 위해 철원과 김화 지역주민들을 노력공작대 이름으로 총동원시켜 구 소련식 공법으로 교량설치공사를 시작한 후, 다리의 북쪽 부분만 완성한 상태에서 6.25가 터져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전쟁 이후 이 지역이 수복되고 나서 1958년 12월 나머지 다리부분을 미국식 공법으로 완성 연결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승일교 하부 콘크리트 구조물 형상은 다리 한 가운데 교각을 중심으로 북쪽부분과 남쪽부분의 시공공법이 서로 약간씩 달랐다. 다리 상판을 받치고 있는 아치구조물의 기본형태는 비슷했으나 다리 상판 하중을 아치에 전달해주는 기둥들의 설치갯수와 기둥 상부의 마무리형태는 서로 판이했다.

북쪽아치에는 굵기가 가는대신 많은 수의 기둥들이 설치되어 있었고 상부는 반원형 곡선으로 마무리되어 있는 반면, 남쪽 아치에는 기둥이 굵은 대신 설치된 기둥숫자가 적었고 상부는 둥근 네모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었다.





승일교 건설과 관련하여 또 다르게 전해져 오는 이야기들로는 6.25전쟁 때 영천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뒤 한탄강을 건너 계속 북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박승일 대령을 기리기 위해 ‘승일교(昇日橋)’라고 명명했다는 설도 있었고 승일공원에 서 있는 안내문에는 미 79공병대대중위로 한국에 복무했던 "제임스 N 패터슨" 씨의 자료를 인용, 일본인이 다리 양쪽입구 2경간과 북쪽 1경간만을 완료한 채 중단되었던 것을 1952년 미79공병대대가 나머지 다리부분을 완성했다는 설을 전하기도 했다.

승일교가 건설되었던 정확한 진실이 무엇이든지 간에 승일교는 분명 남북분단을 상징하고 한국전쟁의 비극을 알리는 역사적 현장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북진을 하다가 전사한 대령을 기리기 위해 이름 지여 졌다는 승일교의 전설보다는 남북한이 시차를 두고 완성했다는 남북합작의 다리라는 전설에 더 그럴 듯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믿고 싶어한다.





그 것은 한탄강이 갈라 놓은 두 지역처럼 분단되어 있는 남과 북이 한탄강을 갈라놓은 두 지역을 다시 하나로 이어놓은 승일교처럼 갈라진 남과 북이 서로 다른 이질성을 포용하면서 하나로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염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승일교를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영구 보존케 한 것은 정말로 잘한 일인 것 같다.

여행의 즐거움에는 미지의 세계로 파고드는 즐거움과 귀로만 듣거나 전해 들었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즐거움을 준다. 짧은 여름휴가 여행 길에 잠시 멈추어 서서 만나 보았던 승일교 역시 그 동안 귀로만 듣거나 전해 들었던 것들을 눈으로 보게 해주고 확인하게 해주는 커다란 즐거움을 주었다.





역사의 강을 따라 흘러온 한탄강은 저만이 알고 있을 승일교 유래에 관한 역사적 진실을 가슴속 깊이 간직한 채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 있을 것이고 승일교 역시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탁류 속에 버티고 서서 오늘도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을 것이다. "끝"


문화재청 게시일 2008-01-07 11:06:00.0
문화재청에서 주최한 유네스코 문화유산답사기 "창덕궁 산책"에 이어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공모전에 다시 입선된 "역사의 탁류 속에 우뚝 서 있는 승일교" 라는 답사기 입니다. [2008년 1월 7일 문화재발견 제66호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