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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여행기/중국 계림

중국 계림 여행기 ⑨편 [요산(堯山)과 정강왕성]

by 전태공 2011. 12. 31.


[요산 주변 풍광 1]

중국 계림 여행기 ⑨편 [요산(堯山)과 정강왕성]    

[요산(堯山) 등정]

계림을 여행했던 4박 5일간의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요산 입구]


오늘은 오전에 요산(堯山)을 올랐다가 오후에 독수봉이 있는 정강왕성을 구경하고
저녁에는 마지막 코스인 양강사호(兩江四湖)를 유람한 뒤 밤 비행기로 귀국할 예정이다.



[요산 주변 풍광 2]


아침 10시가 조금 넘어 요산(堯山) 케이블 승차장에 도착 
스르렁~스르렁~ 다가온 2인승 리프트에 올라타고 산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요산을 오르는 리프트 1]


해발 200미터 내외의 나지막한 산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계림에서 가장 높다는
해발 909m의 요산(堯山)은 석회암이 아닌 흙으로 이루어진 유일한 육산이라고 한다.



[요산 주변 풍광 3]


리프트가 조금씩~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면서
저 멀리 둥글둥글 솟아있는 전형적인 계림의 산들이 파노라마가 되어 다시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요산 주변 풍광 4]


리프트 오른쪽으로는 골프장의 푸른 초원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고
저 멀리 산(山)너머 산(山), 그 산(山)너머 또 산(山)들이 첩첩산중을 이루고 있었다.



[요산 주변 풍광 5]


리프트가 중간쯤 올라온 철탑 옆에서는 디지털 카메라를 든 사람하나가
리프트를 타고 오르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 샷타를 눌러대고 있었다.



[요산 주변 풍광 6]


아니 이런 산 중턱에서 무슨 사진을 저렇게 찍고 있을까? 의아해 했지만



[요산정상에서 1]


바로 그곳에서 촬영한 디지털 카메라 사진을 위로 전송, 눈 깜박 할 사이에 인화하여
사진에 찍힌 사람들을 상대로 판매를 한다고 하니 세상은 정말 스피드 시대임에는 틀림없었다.





스르렁~거리면서 오르던 리프트는 20여분만에 산 위 승강장에 도착을 했고



[요산정상에서 2]


승강장에서부터는 구불구불 이어진 산책길을 따라 통신 안테나가 있는 정상 부근
와불(臥佛)전망대까지 다시 걸어 오를 수 있었다.



[요산 와불 전망대]


부처님이 누워 계시는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는 와불전망대 앞에 서니
아~ 동서남북 사방으로 겹겹이 포개져있는 수 많은 산들이 엷은 운무에 살포시 감 싸여 






대자연의 진경산수가 그대로 한 폭의 흑백 수묵화와 오색찬란한 수채화가 되어
눈 길이 닿는 곳마다 흐드러지게 펼쳐져 있었다.



[요산 정상 리프트 하차장]


동쪽을 바라보며 서 있는 수탉의 모습으로 비유된다는 중국지도에서
닭의 아랫배, 계란 위치쯤에 자리하고 있는 계림은 중국에서 최고의 명당자리로 친다는데





중국의 명당 계림에서도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명당이 바로 여기라고 하니
요산(堯山)은 중국의 명당 중에서도 가장 빼어난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달마대사 두상]


그런 명당자리를 찾아 묘를 쓴 당나라 요황제 때문에 이 산을 요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데
가이드에게 중국의 장례문화에 대하여 들어보니 중국식 장례 종류에는





높은 산에 시신을 옮겨 굿을 한 후 새 먹이로 주었다는 천장(天葬)을 비롯하여
깎아지른 절벽에 받침대를 놓고 관을 매달았다는 현장(懸葬)이 있고





시신을 잘 감싸서 물 속에 풍덩~ 빠트려버린다는 수장(水葬)과 함께
시신을 서있는 자세로 묻었다는 매장(埋葬) 등, 4가지 종류의 장례방식이 있었다는데



[요산정상에서 3]


중국을 개방시킨 주은래와 등소평이 스스로 화장을 솔선수범하여 장묘문화를 변화시킨 덕분에
지금의 중국은 법적으로 조상묘 봉분을 만들지 못하고 화장을 하도록 제도화되어 있다고 한다.



[요산 리프트 1]


풍수가 좋은 명당자리라서 그랬을까?
요산주변 곳곳에는 수많은 공동묘지들이 으시시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요산 리프트 2]


[정강왕성(靖江王城)과 독수봉(獨秀峰)]

요산을 내려와 점심과 발 마사지까지 마친 가뿐한 몸으로 오후 4시경 정강왕성이라는 곳을 찾았다.



[정강왕성 입구]


정강왕부(靖江王府)라는 간판이 붙어있는 남문을 통해 자금성보다 23년이나 먼저 건설되었다는
정강왕성으로 들어서서 중앙 돌길을 따라 승운전(承運殿)으로 향했다.



[정강왕성 이정표]


승운전에서 정강왕성을 소개하는 간단한 영상물을 보고 난 후
명나라 시절의 자료들이 붙어있는 전시실을 지나 침궁(寢宮) 앞 정원으로 나왔다.



[정강왕성 부부나무]


정원에는 과거시험을 보러 왔던 선비들이 합격을 기원하며 마셨다는 복천장(福泉井)이라는 우물이 있었고
복천장 주변에는 두 그루의 나무가 하나로 합쳐진 연리지(連理枝) 부부나무가 서있었다.



[과거시험장 게시판]


정원을 지나 독수봉 방향으로 넘어가니 옛날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치렀다는 다닥다닥 붙은 좁은 쪽 방들이 나타났고
과거 시험을 볼 때의 주의사항 게시판과 함께 훔쳐보다 걸린 사람을 가두는 이동식 유치장도 보였다.



[과거시험을 보는 쪽방]


과거 시험을 보려는 선비들은 요강하나만이 있는 유치장같은 쪽 방에 들어가
며칠동안을 그 곳에서 먹고 자고 볼일까지 보면서 시험을 치렀다고 한다.



[과거시험장에서 컨닝을 하다가 들킨 사람을 가두는 유치장]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험을 치르는 일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과거시험장을 벗어나니 높은 봉우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홀로 빼어나 아름답다는.. 즉 이러한 아름다움은 세상에 없다는 뜻의 "독수봉(獨秀峰)"이라는 봉우리란다.



[독수봉 동굴 및 바위 벽에 새겨진 석문(石文) 1]


독수봉 아래에는 독수사(獨秀社)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동굴이 있었고
동굴주변 바위 벽에는 수 많은 글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독수봉 동굴 및 바위 벽에 새겨진 석문(石文) 2]


바위에 음각된 어느 석문(石文) 중에 계림에 와서 귀가 닳도록 들어왔던
"계림의 산수가 천하제일이다~!"는 "계림산수갑천하(桂林山水甲天下)"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와 무척 반가웠다.



[독수봉 석문(石文) 중, 계림산수갑천하 구절]


독수봉(獨秀峰)은 계림 시 중앙평지가 갑자기 솟아올라 형성된 봉우리라는데
높이가 70여미터에 불과한 낮은 봉우리지만 평지에 솟아있어 계림시가 잘 내려다보인다고 한다.



[독수봉을 오르는 계단 길]


비록 낮은 돌산이었지만 급 경사 돌계단을 오르는 일은 무척 힘이 들었다.

한 계단 한 계단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씻어가며 정상에 올라서니
조금 전 지나왔던 정강왕성 건물들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독수봉에서 내려다본 계림 시 1]


600여년 전의 역사가 숨쉬고 있다는 정강왕성은 
계림지역을 다스리던 번왕이 기거했던 왕성으로 지금은 광서사범대학교 구내에 포함되어 있었다.



[독수봉에서 내려다본 계림 시 2]


번왕이라고 하는 왕은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가 아닌 어느 지역을 관할하는 일종의 토후(土侯)를 말하는데
지금의 대통령을 황제라고 한다면 각도 도지사들을 번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독수봉에서 내려다본 계림 시 3]


명(明)나라를 건국한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은 나라를 세운 후 정국이 불안하자
자기의 아들 24명과 조카손자 1명을 중국 각 지역의 번왕으로 임명하여 간접통치를 했는데



[독수봉에서 내려다본 정강왕성]


그 때 계림지역 번왕으로 임명된 주원장의 조카손자 주수겸이 바로 이 곳에 정강왕성을 세운 이후 
모두 11명의 정강왕들이 14대에 걸쳐 280년 동안, 계림지역을 다스렸다고 한다.




중국의 유명한 지리학자이면서도 여행가였다는 서하객도 올라보지 못했다는 독수봉~!
그 독수봉을 지금 이처럼 올라와 서 있으니 이 얼마나 신바람 나는 일이란 말인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