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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공의 글사랑/회사사보 투고

선암매(仙巖梅)를 기다리며

by 전태공 2011. 12. 19.

선암매(仙巖梅)를 기다리며



사시사철 푸르며 곧고 쉽게 휘어지지 않는 그 기품이 선비의 절개를 닮았다고 하여

사군자(四君子)라고 귀히 이름 불러 온 매란국죽(梅蘭菊竹)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중에 가장 빨리 봄을 알리는 꽃이 바로 매화다. 

 




그래서 예로부터 선비들과 시인묵객들은 매화를 "군자 중의 군자"라고 여기며
섣달에서 춘삼월까지의 긴긴 겨울 동안, 눈 속에 핀 매화꽃을 찾는 "탐매"(探梅)여행에 나섰다고 한다.

내가 매화꽃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전남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 섬진마을", 일명 매화마을에서 열린 매화축제를 구경하고 나서부터였다.
 




백운산 동편자락 섬진강가에 자리한 매화마을에는 청매실농원을 중심으로 10여만평의 넓은 산록 골골마다 수백, 수천 그루에서 피어 오른 매화꽃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흐드러진 매화꽃의 아름다움에 반해 어느 날인가부터 탐구를 시작해 본 매화꽃의 세계~!

거기에는 또 하나의 재미있고 아름다운 매(梅)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매화마을에 심어져 있는 매화나무들은 매실열매를 많이 얻기 위한 개량 매화라던가?





복숭아나무와 접목을 하여 개량한 이 매화나무는 복숭아나무의 성질대로 빨리 자라고

꽃과 열매도 많이 열리지만 수명 또한 복숭아나무를 닮아 길어야 수십 년밖에 살지 못하는 개량종 일본매화라고 한다. 





그렇다면 모진 풍파 속에서도 수 백년을 버텨 와 예로부터 선비들의 마음을 그처럼 사로잡아 오던

우리의 토종 매화들은 과연 지금 어느 곳에 숨어 있단 말인가?

그러한 궁금증들이 나를 토종매화가 있는 고찰을 향해 “탐매(探梅)”여행에 나서게 한지도 모르겠다. 





통도사에 가면 홍매가 있다. 통도사 천왕문을 지난 극락보전 뒤편 음지에 작은 홍매가 있고

그 오른편 영각(靈閣)앞 양지에 선명한 빛깔로 유명한 커다란 홍매가 있다.

양지에 있는 홍매와 음지에 있는 홍매는 서로 꽃이 피는 시기와 지는 시기가 약간씩 다르다.





우수, 경칩도 오기 전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피는 통도사의 홍매에는

붉은 색깔만큼이나 강인한 열정의 아름다움이 스며있다.

 

홍매가 만개할 무렵 매화향이 가득한 통도사 마당에 들어서면

어느 누구든 홍매의 그 붉은 향기에 취해 덩달아 얼굴이 붉어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남해고속도로 승주 I/C를 빠져나가면 바로 선암사 고찰이 나온다.

조계산을 가운데 두고 송광사와 마주하고 있는 고풍스러운 절 선암사에 가면 매화다운 매화 선암매(仙巖梅)를 만날 수 있다.

선암사에는 수령이 600년이나 된다는 토종 매화 칠십 여 그루가 토담을 따라 한 줄로 서있다.

이곳 매화는 3월 하순이 되어야 눈처럼 하얀 꽃을 피워 낸다.





선후기의 화가 장승업을 그린 영화 취화선에서도 바로 이곳 선암매의 모습이 나온다.

특히 토담을 끼고 양쪽에 피어있는 선암매의 아름다움은

고풍스런 산사의 정취와 어우러져 해탈의 경지까지 빠져 들게 해준다.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에 가면 도산매(陶山梅)를 만날 수 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사이로난 경사진 길 좌우로 수백 년 된 매화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다.

퇴계선생께서 도산서원에 심었다는 매화가 바로 도산매이다.

선생께서는 "매화나무에 물 주어라~!" 라는 말을 남기고

임종하였다고 할 정도로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퇴계선생의 한시에는 유난히도 매화를 노래한 영매시(詠梅詩)가 많다.

목단 꽃과 함께 어우러져 피어오른 매화나무 가지 끝에 낮에 나온 반달이라도 걸려 있을라치면

도산매의 아름다움은 신비로움까지 느끼게 해준다.

 

 



안동시 남쪽 풍천면 하회리 낙동강 변에 있는 하회마을을 찾아가면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서 국난을 극복한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선생의 종택이 있다.

그 종택 담장 옆에 수백년묵은 고매 한 그루가 서있다. 바로 유성룡 선생의 호를 딴 서애매이다.

그 서애매에는 유성룡 선생의 올곧은 절개와 기품이 스며 있는 듯한 뭔가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새로 개통된 대전 진주간 고속도로 단성I/C에서 빠져 나와

지리산 방향으로 7∼8분 달려 단속사지 이정표에서 우회전 1∼20여분 좁은 도로로 들어가면

 

통일신라 이래의 고찰로서 1,000여 년의 법통을 이어 오다 정유재란 시의 화재로 폐사되었다는

단속사(斷俗寺)절터를 만날 수 있다. 바로 단속사지다.





이곳에 국내 최고령으로 정당매(政堂梅)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매화나무가 있다.
대표적인 백매화이다. 매화나무는 잎이 피고 난 뒤에 꽃이 피는 다른 식물과 달리 꽃이 피고 난 뒤 잎이 나온다.

 

수백 년 묵은 고목 등걸에 고매하게 달린 꽃의 자태와 추울수록 더욱 짙어지는 향기~!

바로 그 것이 한국토종 매화만의 매력이다.





꼿꼿한 선비들의 기개를 상징한다는 매화~!

 

오후 해질 무렵 이끼 낀 담장을 배경으로 피어 있던

선암매의 신비롭고 고풍스럽던 그 겸손한 아름다움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럴까? 선암매가 피어오르고 있을 선암사가 그리워진다.

 

선암매가 피어오르면 만사를 제쳐놓고 선암사로 달려가 선암매의 매향과

선암매를 띄운 녹차향의 그 신묘한 어우러짐의 맛 속에 또 다시 깊숙히 빠져 보리라.

 

그리고 “이색”의 시조 한 수를 읊어보리라~!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엿는고
  석양(夕陽)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 이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