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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공의 글사랑/회사사보 투고

지중해연안 4개국 해외연수를 다녀와

by 전태공 2011. 12. 17.

지중해연안 4개국 해외연수를 다녀와 

프롤로그 [prologue]

지중해(地中海)~!!! 고대 그리스인들이 그리스가 지구의 중심이니, 그리스 주변 바다도 지구 중심에 있는 바다라고 생각, 붙인 이름이 바로 지구(Terrane)의 중심(medi) 바다라고 해서 영어로 Mediterranean Sea, 지중해라고 불렀다던가?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 3개 대륙에 둘러싸여 있는 지중해...서쪽은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에 있는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대서양과 연결되고, 동쪽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양과 연결되며,북쪽은 흑해와 이어져 있는 이 곳은 그리스, 로마 등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인류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그 지중해 연안에 있는 많은 나라들 중 유럽 쪽에 속한 포루투칼, 스페인, 그리스, 터키 등, 4개국을 9박10일 동안에 다녀왔다.

인천공항에서 파리공항을 거쳐 포루투칼 리스본까지는 비행기로 날아가, 리스본에서부터 스페인 국경을 넘어.... 리스본 →세비야(쎄빌리아) →말라가 →똘레모리노스  →그라나다 →라만차 →똘레도 →마드리드까지 2,100여 킬로는 전용버스로 투어한 후...

마드리드에서 다시 그리스 아테네와 터키 이스탄불까지 날아가 그리스 도시국가 문화유적 및 동로마제국 시절의 비쟌틴 문화와 어울어진 이슬람문화를 체험하고 파리공항을 거쳐 귀국해야 하는 엄마 찾아 삼 만리보다 더 먼 약 3만킬로미터의 멀고 먼 여정이었다.

이번에 여행을 다녀온 4개국 중 터키를 제외한 포루투칼, 스페인, 그리스는 유럽국가연합(EU) 회원국(총 15개국)으로서 통화는 유로화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입국 심사도 어느 회원국 한 곳에서만 수속을 마치면 나머지 회원국 공항에서는 프리패스 해 주는 편리한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출발~! 머나 먼 리스본을 향하여

2003년 10월 6일 월요일, 낮 12시 50분(한국시간)~!300여명의 승객을 빈틈없이 가득 채운 프랑스 파리행 에어프랑스 267편, 최신형 보잉 777-200기가 드디어 푸른 물감이 뚝뚝 떨어질 듯한 전형적인 가을 하늘을 향해 힘차게 솟구쳐 올랐다.

제트엔진의 굉음과 함께 이륙한 동체는 눈 깜박 할 새에 서해상공으로 접어 드는가 했더니 멀리 영흥도를 휘돌아 중국 땅을 향해 기수를 돌렸다. 프랑스 파리까지 약 12시간의 비행 후 다시 또리스본까지 약3시간을 더 날아야 하는 전부 15시간여의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새로운 미지의 세계를 향해 떠나는 여행이 주는 설레임으로 가슴은 콩닥거리기만 했다.

3개 이상의 위성으로부터 정확한 시간과 거리를 측정하여 현 위치를 정확히 계산, 좌석 앞의 작은 모니터에 속도, 고도, 위치 등을 나타내 주는 첨단 위성항법장치 지피에스[GPS : global positioning system]는 내가 탄 비행기가 어디를 지나고 있나?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주어 또 다른 여행의 재미를 안겨 주었다.
비행기는 중국의 북경상공을 지나 몽골 울란바토르, 러시아의 바이갈호, 서시베리아 저지대, 우랄산맥, 발틱해, 독일, 룩셈부르크 상공을 지나 프랑스 파리 드골공항을 거쳐 최종 목적지인 포루투칼 리스본 국제공항에 한국시간 새벽5시(현지시간 밤 10시경)경 도착을 하였다. 그러니까 인천공항 출발 후, 16시간이나 걸려서 머나 먼 이베리아 반도로 건너온 셈이다.

이베리아 반도

너비 14 km의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대륙과 마주하고 있는 유럽 제2의 큰 반도라는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두 나라가 자리하고 있고, 대부분 "메세타"라고 불리는 해발고도 600∼700 m의 고지로 이루어져 대서양과 지중해에 접해있는 땅~!

주먹을 꽉 쥐고 내 민 오른손을 기준으로 손목뼈 관절부분을 피레네 산맥이라고 했을 때, 윗 부분 팔은 프랑스 땅에 해당되고 손목 아래 부분이 바로 이베리아 반도라고 볼 수 있다. 그 이베리아 반도의 손등 부분이 스페인이고 손가락 관절 뼈 아래부분이 바로 포루투칼에 해당된다고 보면 된다.
기원전부터 이 곳에 정착해온 페니키아인, 그리스인 그리고 카르타고인들의 해양성 기질을 이어받아, 해양대국을 이룩한 포르투갈과 함께 18세기 통일제국을 이룩할 때까지 여러 왕국이 남긴 다양한 전통과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스페인이 자리하고 있는 땅이기도 하다.

퉁명스러움으로 다가온 포루투칼

2002년 월드컵 때 그라운드를 누비던 땀방울이 맺힌 피구의 얼굴과 박지성의 통쾌한 왼발 슛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나라 포루투칼~! 희망봉을 거쳐가는 새로운 인도항로를 개척한 바스코다가마의 탐험가 정신으로 전세계로 국력을 확장, 남미 브라질까지 식민지로 둔 적이 있었고 지금도 마카오를 식민지로 가지고 있다는 나라 포루투칼~!

그러나 리스본 공항에서의 포루투칼은 우리에게 퉁명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공항 환전소 직원의 신경질이 유로화 동전을 교환하려는 일행들에게 쌀쌀 맞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아~! 그렇구나!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에 대한 사소한 불친절도 바로 이렇게 우리가 느끼는 것처럼 대한민국의 첫인상이 되어 심어지는 것이구나. 비록 작은 일일지라도 외국인들에게 친절해야겠다는 애국심을 엉뚱하게도 포루투칼 공항에서 느껴볼 수 있었다.

밤이라서 그랬을까? 호텔로 향하는 리스본 시내의 길거리 풍경이 활기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는 길가의 3~5층의 건물들이 서로 다닥다닥 틈이 없이 붙어있었다. 이 나라에는 도대체 건축법이 있는 것일까? 조금은 의아스러웠다. 화재라도 나면 어떡하지? 괜시리 걱정까지 된다. 실제로 오래 전에 리스본은 대 화재가 발생하여 도시 전체 거의가 다 타 버린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주차 난 역시 심각한 상황이었다. 큰길, 작은 길 할 것 없이, 도로 양편에 주차한 차량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개인 차고를 갖지 못한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도로 변과 골목길에 주차를 한다고 한다. 워낙 주차하기가 힘이 드니 손바닥만한 틈만 생기면 앞 뒤에 주차된 차량의 범퍼를 자기차로 쿵쿵 밀어서 틈을 만든 후 차를 세운다고 한다.

우리 나라같으면 매일같이 삿대질을 하면서 싸움이 벌어질 일이다. 도로망 또한 아직도 불합리한 곳이 많고 도로교통표지 판도 아주 인색하였다. 실제로 명색이 1급 호텔이라는 우리가 묵게 될 "메트로폴리탄"호텔을 찾아가는 길을 이 곳, 관광버스 기사까지 헤매야 할 정도였다.

리스본 문화체험~!

호텔 엘리베이터에는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0층이 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1층이 이곳에서는 0층 이었다. 그러니 모든 층은 한층을 더 계산해야 우리가 생각하는 층이 된다. 이 곳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는 옛날 마차를 끌고 다니던 시절... 마차가 들어오고 나가며, 말을 매두던 그라운드 층을 0층으로 불렀다고 해서 0층을 사용한다고 한다.

9시에 호텔을 나와 리스본 시내 문화체험에 나섰다. 에드워드 7세 공원을 향해 달리는 버스 안에서 리스본시내를 훔쳐보았다. 사람들의 표정에 우수가 깃들어 있는 듯이 보였다. 얼굴에 웃음 끼가 없이 시무룩해 보인다.

15개 유럽국가연합(EU) 회원국 중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라서 그렇게 보였을까? 아니면 유럽식 사회주의체제를 따르고 있는 포루투칼 정치체제의 비 능률성 때문이었을까? 가이드의 말을 빌리면, 이 나라의 실업율은 20% 이상이며 마약복용이 심각한 상황인데도 단속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책임져야지 국가가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 때문이라고 한다. 리스본을 현지에서는 리스보아(Lisboa)라고 불렀다.

대항해 시대를 열었던 포르투갈

에드워드 7세 공원에서 리스본을 재건했다는 영웅 퐁발후작 광장을 지나니 거대한 떼주강이 나타났다. 금문교를 닮은 4월25일 다리를 지나 발견기념탑 앞에 섰다. 15세기 중엽, 포르투갈이 일약 해양대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던 것은 포루투칼의 항해왕 "엔리케"라는 왕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의 해상왕 장보고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엔리케 왕자는 카라벨(Caravel)이라 불리는 범선을 제작케 하고, 항해기법과 장비를 개발하여, 미지의 땅 아프리카 등지로 대규모 선단을 보내 원양항로를 개척했단다. 엔리케가 쌓아올린 기반 위에서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항로를 개척했으며 브라질을 발견 식민지화했다고 한다.

지리상의 발견이라고 불리는 대항해시대는 이렇게 엔리케 왕자와 컬럼버스라는 영웅에 힘 입어 이베리아반도에 있는 두 왕국에 의해 주도됐다고 한다. 바다 같은 느낌을 주는 떼주강 가에는 바로 이 항해왕 엔리케 왕자를 기념하는 발견기념탑이 서 있었고 그 옆에는 정치범을 가두는 물 감옥으로도 사용된 적이 있다는 외국선박의 출입감시탑, 벨렘탑이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우아하고 당당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다.

발견기념탑 건너편에는 인도 항로 발견자인 바스코 다가마의 항해를 기념해서 세워졌다는 고딕 르네상스 건축물인 제르니모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려한 문을 지나 입구에 들어서니 웅장한 고딕양식의 천장구조가 놀라운 이름다움으로 다가왔다 내부에는 바스코 다가마와 '포루투갈의 세익스피어'라 불리우는 루이스 다 카몽에스, 그리고 3명의 왕들이 잠들어 있었다.

포루투칼 현지식으로 먹어본 첫 점심~! 기름이 둥둥 뜬 미역국처럼 생긴 스프의 뒷맛이 영 비위에 맞질 않았다. 가지고 간 라면 스프를 살짝 뿌려보았다. 감칠맛으로 변했다. 느끼한 버터와 쨈 대신 튜브 고추장을 짜, 빵에 발라 먹어보았다.. 역시 감칠 맛이다. 입맛 역시 신토불이를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다. 포루투칼 사람들은 점심을 2~3시간씩 즐긴다고 한다. 그래서 식당에선 번갯불에 콩 구어 먹 듯, 후다닥 헤치워 버리고 가는 한국인들이 단연 인기라고 한다. 식당의 회전율은 높일 수 있기 때문이라던가?

국경을 넘어 스페인으로

한없이 착하고 순박해 보이는 사람들....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우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포루투칼 사람들 곁을 떠나 리스본에서 약 430킬로 떨어진 스페인 세비야를 향해 출발했다. 길이가 14.5킬로라는 바스코다가마 다리를 지나 스페인과 연결된 고속도로로 접어 들었다. 주 중이라서 그런지 고속도로에는 차가 별로 없었다.

여름에는 무덥고 가물어서 9월 중순경부터나 농사가 시작된다는 고속도로 변 밀밭에서는 10월인데도 한참 땅을 갈아엎고 있었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이 지은 집들이 줄줄이 지나갔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올리브 밭이 나타난다.

차창 밖으로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이 계속 이어지다가 우측으로 멀리 지중해가 보이는가 싶더니 드디어 스페인 국경을 넘었다. 국경이라고 해도 무슨 톨게이트와도 같이 생긴 검문소 비슷한 것만 하나 있을 뿐, 검문하는 사람조차도 없었다.

스페인 국경을 넘으니 고속도로 주변 모습이 금방 변하기 시작했다. 포루투칼과는 달리 고속도로 교통안전 시설물들이 잘 구비되어 있었고 이정표도 빈틈없이 설치되어있었다. 국력의 차이라는 것이 바로 이렇게 나타나는 것인가 보다.

투우, 축구, 플라멩고의 나라 스페인(에스파냐)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과 무적함대로 한때 세계적으로 위용을 떨쳤던 에스파냐, 스페인.. 서쪽으로 포르투갈, 북쪽으로 프랑스에 접하고, 남쪽으로 지브롤터 해협을 사이에 두고 모로코와 마주하며 동쪽으로 지중해, 북서쪽으로 대서양에 면하고 있는 나라...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에스파냐, 스페인은 포르투갈과 함께 15세기 말부터 유럽을 세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데 주역을 담당했던 나라였다.

축구, 피카소, 플라멩고 등이 떠오르는 이 나라에는 이곳 저 곳에 대제국의 역사와 자긍심이 스며있는 나라이다. 카톨릭국가인 스페인~! 그러나 스페인에는 카톨릭 문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슬람, 유대교와 기독교의 문화가 함께 살아 숨쉬고 있는 나라이다.
 
8세기 동안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였던 이슬람 문화와 국토회복운동, 레콩기스타에 의한 기독교문화와의 싸움으로 서로 뺐고 빼앗기는 역사 속에 카톨릭 대성당과 이슬람 사원으로 대표되는 두 문화가 혼재되어 살아 온 나라이기도 하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 세비아

스페인 남부, 지중해와 접해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은 우리나라로 치면 곡창지대인 전라도 호남평야에 해당 된다고나 할까? 맑은 날이 많고 일 년 내내 기온이 높으며 강수량이 적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가진 지방이라서 유럽으로부터 밝은 태양을 찾아 오는 관광객들이 한 해에 천만 명이 넘을 정도로 유럽에서 손꼽히는 리조트 지역이라고 한다.

세비야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주도이자 무역항이다. 영어로는 쎄빌리아로 부른다. 세비야를 무대로 한 3대 오페라, 로시니의 가극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비제의 가극 "카르멘(Carmen)" 바이런의 "서사시" 의 무대이기도 한 세비야는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와 탐험가 마젤란이 출항했던 항구이기도 하단다.

정열적인 플라맹고 춤에 빠져본 저녁

리스본으로부터 4시간반을 달려와 저녁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밤10시부터 시작되는 스페인의 민속 춤, 플라맹고를 관람하기 위해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휴식할 틈도 없이 세비야 시내의 엘 파치오 세빌냐노(EL PATIO SEVILLANO)극장으로 달려갔다. 2층 구조의 조그만 소극장 내부에는 벌써부터 여러 나라 관광객들이 찾아들어 자리를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입장료는 1인당 70유로(URO)...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약 9만6천원에 해당되는 비싼 요금이었다.

스페인을 이야기하면서 빼 놓을 수 없다는 플라멩고~! 플라맹고란 5세기초에 에스파냐의 남부 안달루시아지방에서 발달한 집시 기원의 음악과 무용을 말한다. 플라맹고의 음악부분은 칸테 플라멩코(cante flamenco), 무용부분은 바일레 플라멩코(baile f.)라고 하며 음악반주에는 기타반주가 따르고 무용에는 캐스터네츠(딱딱이)가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플라맹고의 3대요소를 일컬어 노래(엘 칸테), 춤(엘 바일레), 키타 및 타악기 연주(엘 토케)라고 한다던가? 

플라맹고는 인도의 북부지방 펀잡주로부터 이주해 들어온 유랑민족, 즉 집시(gypsy)들이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에 정착하게 되면서 그들만의 독특한 음악을 만들어내 삶의 애환과 사랑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10시정각~!
라비아풍으로 장식된 조그만 무대 위에 남녀 무용수 세 쌍과 기타리스트 한명, 가수 한명이 나타나면서 ,플라맹고가 시작되었다. 여성무용수들은 만톤(Manton)이라는 숄을 어깨에 걸치고 꼬리처럼 단을 길게 늘어뜨린 스커트를 흔들어 대면서 현란한 춤을 추었고, 여성스러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진 남성무용수들은 강렬하고 경쾌한 구둣소리 리듬[사파테아토(Zapateado)]과 손가락 튕기는 소리[피토스(Pitos)] 그리고 손뼉소리로 리듬과 박자를 맞추며 춤을 추었다.

남녀 무용수들이 여럿이..또는 솔로로 번갈아 출현하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하며 그려내는 뜨거운 메시지에 극장 안의 관중들은 어느 틈에 스르르 그들과 동화되어 가고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함몰되어 갔다. 모든 관객들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 듯..."올레~(잘한다~!)" "올레~"를 연발하였다. 무대를 두드리는 구둣발 리듬, 손뼉, 손가락 소리들이 조화된 오케스트라가 되어 온 몸과 마음에 진동으로 전해져 왔다. 아~  바로 이 것이 플라맹고의 감격이었던가? 아~! 플라맹고여~! 플라맹고여~!

세비야 대성당

세비야 시내에는 가로수로 심어진 야자수 나무가 상큼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은 계속 구름한점 없이 맑았다. 영화 스타워즈를 촬영했다는 세비야의 시청건물, 스페인광장을 잠깐 둘러보고 나서 과거 유태인들이 많이 살았었다는 좁고 미로 같은 산타 쿠르즈 거리를 지나 유럽에서 로마의 베르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이라는 세비아 대성당(Catedral)을 찾았다.

고딕 양식을 가진 이 대성당의 98m 높이 첨탑에는 세비아의 심벌이라는 히랄다(Giralda)탑이 서 있었다. 이 탑은 원래 이슬람 사원의 첨탑이었으나, 후에 기독교도들이 이곳을 정복하고 나서 이 위에다 종탑을 첨가하였다고 한다. 이 작은 첨탑 하나에도 이슬람교과 기독교 사이의 갈등이 스며 있었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니 어마어마 한 성당건물 구조가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내부에는 신대륙을 발견한 컬럼버스와 그 아들의 묘가 있었는데 컬럼버스의 진짜 유골이 서로 자기나라에 있다고 스페인과 쿠바가 각각 주장하고 있어 현재 유골의 진위를 가리기 위한 유전자 감식을 하고 있다고 한다. 컬럼버스의 관을 매고 있는 네 사람의 동상은 스페인 왕들의 모습이라는데 그만큼 컬럼버스의 업적을 높게 평가하는 뜻이란다.

황금색의 중앙 예배당과 함께 왕족만 출입할 수 있었다는 왕실 예배당은 웅장하고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주제단은 세계 최대의 목제 제단으로서 폭 20m, 높이 13m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예수와 마리아의 생애가 36개 장면의 성화로 그려져 있었다. 계단이 없는 경사진 길을 따라 히랄다 탑 정상에 오르니 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 왔다.

세비야 대성당을 나와 알카사르(Alcazar) 궁전으로 들어가 보았다. 서기 712년 이후, 약 500년 동안 이곳을 통치한 이슬람 교도들의 지배 시절에 지어진 이 궁전은 회교양식 특유의 섬세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중세에 유행하던 고딕 양식을 혼합하고 있었다. 눈부신 보물들도 가지고 있는 이 궁전은 중앙의 아가씨 정원을 중심으로 '소년의 안마당', '인형의 안마당', '대사의 방'등을 배치한 독특한 건축 양식으로 지어져 있었다.

코스타 델 솔(태양의 해변)의 현관 도시 "말라가"

코스타 델 솔(Costa del Sol)~! 스페인어로 태양의 해변이라는 뜻을 가진 이 곳은, 스페인 동부 지중해 해변도시 "모트릴"에서부터 남부 지브롤터 해협에 있는 "타라파"까지 이어진 약 300km의 해변을 말한단다. 우리가 찾아가는 말라가는 태양의 해변으로 들어가는 현관에 해당되는 도시다. 우리 나라로 치면 한려수도의 시작점인 여수항 정도라고나 할까?

말라가를 향하는 A-92 고속도로 역시 막힘이 없었다. 멕시코 민요 베사메 무쵸(키스를 해 주세요~! 라는 뜻)에 나오는 리라꽃이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며 붉게 피어 있었다. 이 곳 고속도로 변 역시, 온 천지에 올리브 밭이 가꾸어져 있었다. 이 올리브 나무는 가물고 메마른 땅에서도 저 혼자 잘 자라며 손이 많이 가지 않는 나무라고 한다.

피카소의 생가 와 히브랄파로 성

말라가에 도착한 버스는 좁은 시내 길을 비집고 피카소 생가가 있는 라 메르세드 광장으로 기어 들어갔다. 우리나라 연립주택 같이 생긴 피카소의 생가를 들어가니 아가씨 하나가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집안을 안내해 준다. 이곳에는 피카소가 소년 시절에 쓴 편지와 일기, 만화 등이 있었는데, 이때 그린 만화가 피카소의 걸작 '게르니카' 를 그리게 된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피카소의 생가를 둘러본 일행은 이슬람 세력이 최후까지 항거를 했다는 히브랄파로 성을 찾았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이슬람 전사들의 피가 배어 있는 듯, 성벽은 피 빛, 황토 벽이었다. 성벽에 올라서니. 야자수에 둘러싸인 지중해가 한 폭의 수채화가 되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 투우장 넘어 항구에는 거대한 유람선이 정박해 있었다.

한여름 휴가 철에는 각국에서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길을 걸으면 스페인어보다 영어가 더 많이 들려 온다는 코스타 델 솔의 중심인 똘레몰리노스에 있는 아름다운 알 안다루스 호텔에서 또 하루의 여장을 풀었다.

에스파냐의 마지막 이슬람왕조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지중해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은 언제나 감미로웠다. 하늘은 계속 우리나라의 가을하늘처럼 맑고 높았다. 아침부터 서둘러 알함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를 향해 출발했다. 말라가에서 230여 KM 떨어져 있는 인구 약 24만의 그라나다는 이베리아반도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는 최후의 이슬람 왕국의 수도였단다. 그런 선입견에서였을까? 그라나다에는 아직도 이슬람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끼고 있는 그라나다에서 알함브라 궁전은 조그만 언덕 하나를 넘어야 했다. 고개를 넘는 언덕 야산자락에는 지금도 집시들의 살고 있다는 크고 작은 동굴들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스페인 정부에서 동굴 앞에 새집을 지어 주어도 동굴이 편하다며 집시들은 계속 동굴생활을 고집하고 있다고 한다. 언덕을 넘어가니 말로만 듣던 알함브라 궁전 입구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라는 클래식 기타음악이 들려 오는 듯 했다.

알함브라(Alhambra) 궁전~!

아랍어에서, 알(AL)은 영어의 정관사 The에 해당된다고 하니, 함브라(hambra)궁전이라는 뜻이 된다. 스페인 최후의 이슬람 왕국이었다는 나사리 왕조의 마지막 왕인 "보아브딜" 왕은 스페인 국민의 국토 회복 운동(레콩키스타)에 굴복하여 평화적으로 이 성을 카톨릭 왕에게 건네주고 아프리카로 떠났다고 한다.

이 때가 1492년, 바로 컬럼버스의 신대륙을 발견한 해라고 한다. 이 알함브라궁전의 함락으로 스페인은 약 8세기에 걸친 이슬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카토릭을 국교로 하는 근대 스페인국가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슬람왕국의 번영기였던 14세기에 지어진 붉은 성이란 뜻을 가진 알함브라 궁전은 세 개의 정원, 즉 마추카의 정원, 코마레스의 정원, 그리고 라이온의 정원을 기본 축으로 하여 설계된 정원 형식의 건축물이다. 내부는 왕궁, 칼로스 5세의 궁전, 헤네라리페, 알카사바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특이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환상적인 궁전 내부의 바닥과 벽에는 동일한 모양의 타일, 모자이크를 이용해 틈이나 포개짐 없이 평면이나 공간을 완전하게 덮는 '쪽매맞춤'이 되어 있었다. '테셀레이션(tessellation)'이라고 불리우는 이 다양한 모자이크 문양들에서 디자인에 대한 영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명품 회사들이 새로운 상품디자인을 개발할 때, 담당 디자이너들을 바로 이 곳 알함브라 궁전에 출장을 보낸다고 한단다.

이 궁전은 원래 집과 학교, 정원 등으로 구성된 요새였으나 지금은 나스리드 궁전과 알카자바의 요새만이 남아 있었다. 17세기 초까지만 해도 거의 폐허처럼 버려져 있다가, 작가 워싱턴 어빙이 「알함브라 이야기」라는 책을 펴낸 후 관심이 고조되어, 1862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마지막 이슬람 왕이던 "보아브딜" 왕은 너무나 아름답고 아끼던 이 왕궁을 기독교세력에게 빼앗긴 후, 땅을 치며 통곡했으며 죽을 때, 누군가 이 궁을 꼭 찾아줄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을 지나 성곽 바깥을 돌아 나오자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을 상상하며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헤네랄리페 정원이 나타났다. 알함브라 궁전 동쪽에 만들어진 이 정원은 기화요초들이 온갖 꽃을 피우고 있었으며 입구로부터 사이프러스 나무에 둘러싸인 숲 길이 쭉 뻗어있었다. 성주가 여름 별장으로 만들었다는 이 정원은 물과 숲이 잘 조화된 유토피아를 닮아 있었다.

"동키호테"가 숨 쉬는 라만챠지방을 가로질러

알함브라 궁전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마드리드를 향했다. 약 450킬로를 달려가야 마드리드란다. 그라나다를 벗어난 외곽, 산타페라는 도시에서 점심을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수출된 산타페 한 대가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산타페(Santa Fe)는 스페인 어로서 "성스러운 믿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이처럼 스페인어로 된 우리나라의 차 이름으로서, 마티즈는 "세계조화", 티뷰론은 "상어", 에스페로는"희망", 시에로는 "하늘"이라고 한다던가.

마드리드를 향하는 A-92번 고속도로 역시 막힘 없이 잘 달려 주었다. 끝 없이 이어지는 올리브 농장 끝 자락에서 간간히 작은 소도시들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황급히 뒤로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들과 산에 무덤이 하나도 안 보였다. 스페인의 장묘문화에 대하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 곳에는 사람이 사는 동네 어귀에 묘지들이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교회 종소리가 들리는 거리 안에서 사람이 살고 묘지도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얼마를 달렸을까? 고속도로가 E-902로 분기되면서 라만차지방으로 접어 들었다. 돈키호테의 주무대로 유명한 라만차는 스페인의 중부지방으로서 포도 재배 면적이 가장 넓어 많은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라고 한다. 라만차에 살던 '키하나'라는 시골 영감이 기사 이야기 책에 심취한 끝에 스스로가 이야기 속의 주인공, 라만차의 기사로 변신... '부정한 것은 바로 잡고 불쌍한 사람이나 억울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 며 헤프닝을 벌리는 세르판테스의 '돈키호테'이야기가 살아 숨쉬는 듯, 라만차를 가로지르는 우리의 버스는 어느 틈에 풍차를 향해 달리는 동키호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풍차를 향해 달려가는 듯 했다.

마드리드 유니언 페노사 전력회사.

마드리드는 활기에 넘쳐 보였다. 포루투칼 리스본의 침침한 느낌과는 달리, 거리에는 인파가 넘쳐 흐르고 있었고 건물들의 모습도 밝아 보였다. 현대적인 도시 미와 함께 깔끔한 인상을 주었고 뭔가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듯한 차분한 느낌을 주었다.

마드리드 시내의 상징물이라는 피사의 사탑을 닮은 쌍둥이 빌딩을 지나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유니언 페노사 (Union Fenosa) 전력회사 본사를 방문하였다. 사전에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친절하고 성의 있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회사에 대한 각종 현황 홍보자료도 잘 구비해 주었고 브리핑을 해준 파워포인트 내용도 짜임새가 있었다.

브리핑을 듣고 난 일행은 똘레도에 있는 발전소 견학에 나섰다. 회사 직원의 선도차량을 따라 한시간 여를 달렸을까? 작은 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두기의 LNG연료 화력발전소가 나타났다. 발전소 보일러 건물은 옥외형으로서 무척 낡아 보였다. 노출된 철골들과 각종 발브류는 녹이 슬어 있었다. 오히려 우리회사 태안화력발전소 같은 아름다운 발전소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낡은 주제어실 등, 이런 저런 설비에 대한 견학을 마치고 나니 어느 틈에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똘레도 대성당

똘레도는 스페인에서 단위 면적당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란다. 도시 전체가 그대로 하나의 박물관이자 거대한 미술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어서 1986년에 유네스코에 의해서 인류문화유산 지역으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중세 시대의 외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똘레도는 흡사 낙동강이 휘돌아 나가는 하회마을처럼 따호강이 휘돌아 흐르고 있었다. 따호강은 포르투갈 리스본을 통해 대서양으로 흘러 드는 '떼주'강의 스페인 이름으로서 총연장 약 1100 km로 스페인에서는 가장 긴 강이라고 한다.

로마 지배 후 6세기에 접어들어 서고트의 수도로 번성한 톨레도 역시, 유태교, 이슬람교, 기독교 양식이 그대로 섞여서 남아 있는 역사의 도시라고 한다. 13세기 초부터 15세기 말에 걸쳐 건설된 똘레도 대 성당은 지금도 스페인의 수석 성당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고 하며 이 곳 추기경이 다음 번 교황 후보 중의 한 사람이라고 한다. 까를로스(Carlos) 5세의 문장인 쌍두 독수리가 조각된, 붉다는 의미를 가졌다는 비사그라문과 태양의 문을 지나 옛날 마차가 다니던 울퉁불퉁한 전형적인 좁은 돌길을 따라 들어가니 똘레도 대성당(까떼드랄 Catedral)이 나타났다.

길이는 120m, 너비가 60m, 가장 높은 부분이 40m에 까지 달한다는 성당을 들어가니 전부 750여개가 설치되어 있다는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웅장한 성당내부는 둥근천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모두 32개의 굵은 기둥이 있었고, 제단과 성가대석이 중앙에서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었다.

대제단 왼편에 위치하고 있는 성물실의 둥근천장에는 수 많은 천사들과 인물들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상으로 그려져 있었다. 성물실 안쪽에는 "엘 엑스폴리오"라는 엘 그레꼬의 대작과 "유다의 입맞춤"이라는 고야 그림들이 있었다. 대제단 병풍에는 예수의 탄생과 성모의 승천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조각되어 있었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의 생애와 고난이 36장면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대제단 맞은편 성가대실은 호두나무로 된 좌석이 있었고 각 의자의 등받이에는 그라나다 이슬람제국을 정복하는 과정을 한 장면씩 묘사한 그림이 조각되어 있었다. 출입구 옆에는 대리석 백 성모상이 서 있었다. 성당 내 보물실에는 중앙의 "성체 현시대"라는 보물을 중심으로 성당이 소유하고 있는 온갖 보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똘레도 대성당~! 한 마디로 통째로 감격이었다.

그레꼬의 숨결이 담긴 산또 또메(Santo tome) 성당

대성당의 감격을 가슴에 않고 산또 또메 성당을 방문했다. 이 곳은 화가 "알 그레꼬"의 불후의 명작인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El entierro del Conde de Orgaz)'라는 벽화가 있는 곳이었다.

생전에 자선 사업을 많이 해서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는 오르가스 백작의 장례 식을 그린 벽화로서, 하늘에서 두 성인이 내려와 백작의 영혼을 하늘로 데리고 갔다는 전설의 내용을 화가인 그레꼬가 벽화로 남겼다고 한다. 정신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며 백작의 영혼이 예수의 지시에 따라 천사의 손을 통해 열려진 하늘 문으로 올려지는 장면이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벽화인 관계로 이 그림은 500년이 넘도록 이 성당을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었다는데 마치 막 그려진 것처럼 채색 상태가 완벽하였다. '천지창조', '최후의 만찬' 등과 함께 세계의 3대 명화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한다.

프라도 미술관

똘레도에서의 감흥이 식기도 전에 마드리드의 또 다른 명소 프라도 미술관이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대영박물관, 루불박물관 등과 함께 세계 4대 미술관에 속한다는 프라도 미술관에는 스페인 미술사의 3대 거장이라는 엘 그레코(1541~1614)와 디에 고 벨라스케스(1599~1660) 그리고 프란시스 코 고야(1746`~1828)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었다.

입구에 "고야" 동상이 서 있는 미술관을 들어서니 수많은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페인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세례","삼위일체"등과 , 벨라스케스의 "궁녀들","불카노의 대장간", 그리고 고야의"마드리드, 5월2일","옷을입은 마야","옷을 벗은 마야",등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블랙 페인팅이라고 불리는 어두운 색채의 고야 작품들이 오랫동안 여운에 남았다.
 
약탈미술품이 한점도 없다는 특징을 가진 프라도 미술관을 제대로 보려면 1주일도 넘게 걸린다는데 짧은 시간밖에 가져보질 못한 일정이 너무 아쉬웠다. 그러나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을 보면서 미술에 대한 문외한도 미술에 흠뻑 취할 수 있다는 소중한 느낌을 받았던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을까?

올리브 수확과 마드리드의 모로코인들 

지중해 연안 국가들 모두가 마찬가지이겠지만 이 곳 스페인에도 올리브 농장이 무척 많은 나라이다. 그 드넓은 평원과 산 자락..고속도로 좌우의 땅들이 거의 다 올리브 밭으로 일구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 올리브 나무는 높이 5∼10m 정도 크기의 나무로서 올리브 열매는 그 모양이나 크기가 흡사 우리나라 대추를 닮았는데 이 열매에서 올리브유를 짜내고 식용하기도 한단다. 그런데 이 올리브열매 수확하는 일은 기계화되어 있지 않아서 사람 손으로 직접 수확하여야 하는데 스페인의 일손 부족으로 모로코 노동자의 힘을 빌린다고 한다.

그런데 올리브 수확이 끝난 이후.. 모로코 인들은 일거리가 별로 없는 자기나라에 귀국하지 않고 불법으로 마드리드로 흘러 들어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 모로코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현금을 많이 가자고 다니는 동양사람들만을 상대로 소매치기나 강도를 일 삼는다고 한다.

경찰에 잡혀도 스페인사람들은 털끝하나 손을 안댔기 때문에 8시간 후면 훈방된다고 하니 속수무책이라고 한다. 가이드 역시 직접 두 차례나 강도를 당해 결혼반지와 시계를 털렸다는 예기를 듣고서 스페인에서의 마지막 밤을 호텔에 갇혀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사람들

스페인 사람들은 참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먹는단다. 스페인사람들의 점심식사 시간은 오후 2시에서 4시, 저녁 식사는 8시가 넘어야 시작된다고 한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저녁을 먹고 나면 일찍 잠자리에 들 수가 없으니 밤 늦게까지 떠들고 놀다보니 아침에는 늦잠을 자곤 한단다. 그렇게 하루에 네 시간 이상씩 식사를 해도 스페인 사람들의 일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훨씬 높다고 하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스페인사람들은 열심히 일하여 자기 성취를 한다든지, 일을 통해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는다는 생각을 웃기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단다.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 사람들이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예기가 아니라 일하는 것보다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그냥 즐겁게 조금만 일을 한다는 식이라고 한다고 한다. 

또한 스페인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담배를 참 많이 피운다. 모든 곳에 담배 자동 판매기가 있고, 금연 표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스페인사람들은 복권 사기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이 복권 사는 데 소비하는 돈이 보험을 드는 돈보다 10배나 많다고 하니 가히 복권공화국이라고 해야할까?

아듀 스페인~! 지중해를 가로질러 그리스 아테네로

오후 2시경 드디어 마드리드 공항을 이륙하였다. 그리스 시간에 맞추어 시침을 2시에서 3시로 한바퀴 돌려 놓았다.

아듀~! 스페인~! 기창으로 보이는 스페인의 드넓은 평원에는 역시 올리브 나무가 빽빽하다. 비행기가 스페인 땅을 벗어나 지중해 상공으로 접어 들었다. 지중해의 맑은 물이 에머랄드 빛으로 내려다 보인다. 이륙한지 3시간 반이 넘어 그리스 아테네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남한의 1.3배 정도의 국토에 인구가 천만이 조금 넘는다는 그리스...발칸반도 남쪽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 그리스는 발칸반도에 있는 본토와 국토의 5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3천 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본토의 서쪽 해안은 이오니아해, 동쪽과 북동쪽 해안은 에게해에 둘러싸여 있다고 한다.

이오니아해나 에게해나 모두 다 지중해에 속한 바다라고 한다. 파란 하늘 아래 파란 바다와 하얀 집들이 어우러져 엮어내는 그림 같은 에개해의 아름다운 경치로 유럽에서도 아주 유명한 휴양지로 알려져 있어 일년 내내 관광객들로 들끓는다고 한다. 공항을 나와 스파타 평야를 가로질러 얼마를 달려왔을까? 하얀색 건물들로 가득한 아테네 시가 눈에 들어왔다. 

2004년도 올림픽 개최지 아테네 

학창시절에 읽어 보았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비한 이야기가 살아 숨쉬고 있는 듯한 그리스 아테네에는 파란 하늘과 파란 바다, 파란 지붕을 가진 하얀 집들을 가득 품고 있었다. 시내 어디를 둘러 보아도 고층건물은 보이질 않았다. 땅거미가 내리는 아테네의 거리는 지중해와 에게해에서 불어오는 듯한 바다 내음이 스며 있는 듯 했다. 

그리스 신화의 여신 아테나에서 유래한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는 서구 문명의 발생지이자, 고전 문명의 많은 지적·예술적 사상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곳이다. 25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와 함께 해온 아테네는 2004년도 하계 올림픽 개최 준비 때문이었을까? 여기 저기 많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신타그마 광장을 지나 호텔로 향하는 길목으로 접어드니...

아~! 저 멀리 웅장한 아크로폴리스의 야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아크로폴리스

그리스의 하늘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서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에 버티고 있어서 반대로 아테네의 어느 곳에서든 아크로폴리스를 볼 수가 있었다. 대리석, 하얀 색으로 솟아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무척 아름다웠다. "높다"는 뜻의 아크로(Acro)와 "도시"라는 의미의 폴리스(Police)가 합쳐져 "높은 곳에 있는 도시"라는 뜻의 아크로폴리스는 기원전 6세기쯤에 건설되었다고 한다.

상큼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아크로폴리스를 올랐다. 행운이었을까?  국기게양식을 위해 대오를 지어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는 30여명의 그리스 근위병들을 만났다. 그리스청년들이 이 근위병으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세가지의 조건을 먼저 갖추어야 하는데 첫째, 키가 190센치 이상이어야 하고 둘째, 미남이어야 하며 셋째, 다리가 곧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를 대표하는 남성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래서 그런지 근위병들은 하나 같이 아름다운 청년들이었다. 

아크로폴리스를 오르는 남동쪽 비탈에는 지금도 스페인의 인기가수 공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디오니소스라는 반원형의 극장이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는 폐허와 같은 첫 인상으로 눈에 들어왔다. 삭막한 돌산에 무너져 내린 파르테논 신전의 기둥 대리석 돌 더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 그 어디에도 찬란했던 그리스의 고대문명을 찾을 길이 없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꼬리를 물고 아크로폴리스에 있었따. 아마도 사람들은 아크로폴리스 대리석 돌 더미에서 역사를 느껴보고 신화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설레이는 기대를 가진 듯이 보였다.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 있는 이 아크로폴리스에는 파르테논 신전을 비롯한 수많은 신전들이 2,500여년의 역사를 간직한 채 말 없이 서 있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올림포스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던 성역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었다는 신전..  그러나 그 돌덩이 하나하나에도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던 그리스의 휴머니즘과 민주주의 씨앗들이 가슴속에 전해져 오는 듯 했다.

파르테논신전 

아크로폴리스 지역의 가장 높은 곳에 지어진 파르테논신전은 '처녀의 집'이라는 뜻으로서 아테네 시의 수호신, 아테나를 모신 곳이라고 한다. 처음이 지어질 당시에 천장은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별 모양의 금박장식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신전의 기둥은 배흘림(엔타시스)기둥 방식이 사용되었다는데 이 것은 중간이 오목하게 보이는 착시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기둥의 위 아래가 똑바르게 보이게 하기 위해 미리 기둥 중간부분을 볼록하게 만들어 설치하는 공법으로 우리나라 무량수전에서 볼 수 있는 배흘림 기둥과 같은 공법이라고 한다. 

이 파르테논 신전은 페르시아 전쟁 시 파괴된 이후 일부만 남은체 오랜 세월동안을 그 자리를 지켜 서서 역사를 증언하고 있었으며 유네스코의 지원을 받아 현재 보수 중이었다. 파르테논 신전 옆으로는 전쟁과 세월의 힘으로 부서진 아테나 신전과 함께 여섯 명의 여인상이 조각된 에레흐테온이라는 기둥이 그리스의 슬픈 역사를 증명하고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의 많은 잔해들과 함께 에레흐테온의 기둥 중 여인상 `카리아티드스’의 진품은 현재 대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니,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타 민족에게 시달림을 당해왔는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수니언 곶과 포세이돈 신전

수니언 곶을 찾아가는 길에는 아직도 꽃이 피어있었다. 지중해를 끼고 달리는 해변 길은 한마디로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그 곳에는 초록색 물감을 풀어 놓은 듯이 맑고 투명한 지중해가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운 해안선과 어우러져 꿈결처럼 떠 있던 하얀 욧트들과 야자수[라스팔마스]가 가로수를 이루는 길 양편으로카사불랑카로 불리는 언덕 위의 하얀 집들이 언덕 마다 그림처럼 자리하고 있었고 구비구비 해변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하거나 낚시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테네에서 남동쪽으로 약 70Km떨어진 아띠까반도에 있다는 수니온 곳(Cape Sounion)은 그리스 대륙의 최남단, 육지의 끝으로서 우리나라의 해남 '땅끝마을'에 해당된다. 수니온곶에는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노래했던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모셔진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곶의 튀어나온 끝에 15개의 도리아식 원기둥만 남아있는 포세이돈 신전은 무척 아름다웠다.

파란 하늘을 향해 쭉 뻗은 하얀 대리석 기둥들... 멀리 지중해의 깊은 바다를 내려다 보며 등대처럼 우뚝 서있는 신전은 지중해 바다를 떠 다니는 하얀 욧트와 선인장 꽃과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었다.역사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하얀 기둥 사이로 붉은 태양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신전 앞 절벽 위에 올라서니 우리 서부일행들 모두가 한 순간 에게해를 호령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변신해 가는 듯 했다. 

올림픽 스타디움 

아테네의 도로는 비교적 비좁았다. 도로가 비좁아 가로등을 설치할 공간이 없어 도로 중앙 상공에 케이블로 가로등을 한 줄로 설치해 놓고 있는 것이 신기했다. 아테네시내의 신타그마광장에서 가까운 곳에 1896년 제1회 국제올림픽경기가 열렸던 최초의 올림픽 스타디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길이 200여미터, 넓이 30여미터의 말발굽모양 구조인 이 경기장은 약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로마시대에는 이 스타디움이 투기장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2004년 하계올림픽 때 이 경기장에서는 양궁이 열린다고 하며 마라톤이 골인되는 경기장으로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터키 이스탄불

일찍부터 많은 유적을 가진 오랜 관광국이라서 그랬을까? 그리스 사람들은 참 친절했고 조그만 노천카페에서도 영어가 곧잘 통했다.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던 그리스를 서둘러 새벽같이 떠나 아테네 국제공항을 이륙한 것은 아침8시경, 기내에서 제공된 간단한 스넥을 먹은 후 커피 한잔이 생각 났지만 미처 마실 틈도 없이 비행기는 벌써 이스탄불공항에 착륙하고 있었다.

비행시간이 한시간밖에 안되었다. 그만큼 그리스와 터키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일부 국경까지도 붙어 있는 그리스와 터키~! 그러나, 두 나라는 지금도 견원지간으로 지내고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제국시절 400년간의 터키지배시절을 잊지 못하는 그리스는 터키를 미워하고 있어 유럽국가연합(EU)에 가입하려는 터키에게 무조건 반대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등, 여러 분야에서 반대하는 우리의 대일 감정 이상의 정서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7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인구 7천만명의 나라.. 땅 덩어리가 남한의 7.5배에 달한다는 이슬람국 터키, 이 나라의 수도는 앙카라이지만 터키 경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이스탄불에 전 인구의 약 20% 정도인 약 1,300만명이 모여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각 시대별로 "비쟌티움", "콘스탄티노플"로 불려오다가 15세기에 들어서부터 오스만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오늘날의 "이스탄불"로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스포루스해협의 남쪽 입구에 아시아와 유럽 땅을 한자락씩 끼고 있는 세계적으로 유일한 도시이다. 군용공항과 함께 사용하고 있어서 그랬을까? 이스탄불 국제공항의 보안 검색은 지금까지 지나온 그 어느 공항보다도 훨씬 철저하고 엄격한 듯 했다.

이스탄불의 하늘은 구름한점 없이 맑았다. 이국적이고 신비한 느낌을 주는 이스탄불은 참전16개국으로 우리를 도와 주었고 월드컵 당시의 좋은 기억들로 인한 선입견이었는지는 몰라도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걸쳐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와 유럽 익스프레스 급행열차의 종착역이라는 등의 여건으로 이 곳은 또 스파이들의 천국이라고도 하며 007 등, 영화 속에서도 많이 등장한 곳이기도 한다. 

4세기경 로마 제국이 동로마, 서로마제국으로 갈라지면서 동로마 제국을 비잔틴 제국이라 불렀다. 역사적으로 서로마가 5세기경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였지만 동로마, 비쟌틴 제국은 서기 1453년 오스만 터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그 제국과 문화를 유지하였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웠던 시절에 이스탄불은 비잔틴제국의 기독교 문화를 대표하였다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 성소피아 성당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 건축물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기독교 국가로서 1230년동안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 있던 콘스탄티노플은 1453년 오스만 터키 마호멧 술탄에 의해 망하게 되었다는데 이 때 이 도시는 3일간의 약탈이 행해진 후 이스탄불이라는 이슬람식 명칭으로 불리워 지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다. 이슬람 문화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고도이자,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이스탄불은 그 옛날 실크로드의 여정이 마무리되던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다는 이 곳을 역사학자 토인비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 하였다던가?

성 소피아 성당(Hagia Sophia)

성소피아 성당은 비쟌틴 문명의 절정을 보여주는 명소였다. 직경 32m의 돔을 지상 56m의 높이로 단 한 개의 기 둥도 없이 올려 놓은 불가사의의 건물이라고 한다. 인류의 유산이라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성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황제에 의해. 537년 건립되었다.

이 성을 지은 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내가 이제 솔로몬 당신을 이겼소" 라고 고백했다고 전해 지듯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은 로마 비잔틴 양식의 극치를 이룬다고 한다.비쟌틴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에 의해 건축된 동방 정교회의 대성당으로서 900년 동안 기독교 교회로 사용되어 오다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들어서면서부터 회교사원으로 개조하였다고 하는데 이 때 성당 주변에 4개의 교회 첨탑이 추가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 성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양식의 견본으로서 그 후 비잔틴 건축 양식의 모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회교 사원 양식의 모델로 사용하고 있다 한다. 십자군 전쟁 시 많은 보물이 약탈당했으며 이슬람의 정복자 마호메트는 비록 이교도의 상징적인 건물이었지만 그 엄청난 규모와 각종 모자이크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파괴하지 않고 벽면에 석회만을 덧 발라 회교 사원으로 개조시켜 사용케 했다 한다. 하지만 휴관일이라는 월요일에 이 곳에 도착, 내부를 볼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블루 모스크 

성 소피아 성당을 마주보며 블루모스크(Blue Mosque)라고 불리우는 술탄 마호멧 사원이 서 있었다. 블루모스크는 오스만제국의 마호멧 1세가 성 소피아 성당의 건축양식을 모방하여 1616년에 세운 이슬람 사원이라고 한다. 보통의 이슬람 사원이 4개의 첨탑을 갖고 있는데 반해 블루모스크는 6개의 첨탑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중국 풍의 청색타일로 장식되어 '블루모스크'라 불리워지게 되었다는데, 블루 모스크에서 오스만 황제들이 중요한 의전을 집행했다고 한다. 현재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블루모스크 내부의 웅장한 구조와 현란한 문양을 보면서 이슬람 사원의 아름다운 건축미에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만난 듯한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톱카프 궁전

톱카프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왕을 일컫는 술탄이 거하던 궁이었다. 약 400여년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었다는 오스만제국을 통치하던 이 궁전은 이스탄불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유럽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이 방문하는 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한다.

정복자 마흐메트 2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부의 극치를 보여주는 왕궁으로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새로운 궁전 돌마바흐체 궁으로 옮길 때까지 22명의 술탄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오스만 제국의 명성에 걸맞게 화려한 궁중생활을 알 수 잇는 각각의 방들을 박물관으로 꾸며 놓았는데. 중국, 일본, 유럽의 도자기 1만 5백여점이 전시되어 있었고 보석관에는 세계에서 3번째 가는 86캐럿자리 다이아몬드를 비롯 세계제일의 에머랄드, 6666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순금 촛대, 250kg의 순금 바이람 왕좌를 비롯하여 진기한 보석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독교 유물로는 세례요한의 머리, 손 뼈, 모세의 지팡이, 다윗의 칼, 아브라함의  식기도 있었다.

지하 저수지

이곳 이스탄불의 구시가에서는 어느 방향으로도 눈만 돌리면 보이는 것이 오스만 제국 시절 모스크들의 둥근 지붕과 첨탑들이었다. 마르마라 바다를 끼고 있는 보스프러스 해협을 사이에두고 앉아 있는 건너편 위스크달라를 바라보며 달리는 해변길에서 동(東) 과 서(西), 고(古)와 금(今)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이스탄불을 느낄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 그리스, 페르샤, 로마, 비잔틴, 오스만투르크 등, 역대의 장구한 문명을 계승하고 있는 나라로 자부하는 터키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공존하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적이 있는 나라라고 하는데 짧은 체류시간으로 다 돌아볼 수 없음이 얼마나 아쉬었는지~. 톱카프궁전에서 얼마떨어지지 않는 곳에는 비잔틴 제국시절 건축되었다는 바실리카 지하 저수지가 있었다.

도시민의 식수 문제와 궁전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19km 떨어진 밸그라드 숲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했던 곳이라고 한다. 길이 140m, 너비 70m, 높이 8m로 약 8만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는 이 저수지 기둥들은 고대 그리스 신전들에서 운반되어 온 것으로  336개의 기둥들이 4m 간격으로 28개씩 12줄로 서 있었다. 그 중에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저주의 여신으로 머리털을 뱀 모양을 하고 있는 2개의 메두사 두상들도 있었다.

이스탄불의 재래시장 그랜드 바자르

이스탄불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자 이 여행의 마지막 과정으로 이스탄불 구시가지 안에 있는 "그랜드 바자르"라는 재래시장을 들어가 보았다. 오스만 제국 초기에서부터 형성된 시장이라고 하는 이 시장에는 이스탄불에서 살고 있는 터키인의 삶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4,000여개의 상점들이 둥근 지붕 밑에 들어서 있는 그랜드 바자르는 길다란 통로들이 거미줄처럼 이어져 있었고 그 통로를 따라 이곳 저 곳을 구경하니 어디에나 있게 마련인 종업원들의 호객이 싫지 않았다.

낡은 건물들이었지만 어둑어둑한 조명하에서 운치 있어 보이는 상품들을 구경하면서 몇가지 배운 간단한 터키어.. "카츠파라~!(얼마입니까?)","촉파라 (너무 비쌉니다.)","욕파라~! (돈 없어요)","싸올른 ~!(고맙습니다)"이라는 말을 서툴게 사용, 에누리를 해 가면서 쇼핑을 하는 나의 귓가에 감미로운 이 곳 민요 "위스크다라"가 날아와 앉았다. 

에필로그 [epilogue]

9박 10일간이라는 여행일정~! 거기에 이리 저리 이동해야 했던 시간들까지 빼고 나면 정말로 며칠되지 않았던 그 짧은 기간동안에 무려 4개국을 다녀온 셈이니 지중해 연안 4개국에 대한 문화를 체험하고 이해해 보겠다고 했던 것은 언감생심 말도 되지 않는 과욕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박 겉 핥기 식의 여행이었을지언정 좀처럼 접하기 힘든 이국땅에서 보고 듣고 느껴본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백문이 불여일견...아무리 읽고 듣는다고 해도 직접 한번 본 것만큼 생생할 수 있을까? 이번 지중해 연안 4개국을 여행하면서 크게 두가지를 느껴 보았다. 

하나는 유럽을 이해하고 함께 숨쉬어 보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충돌해 왔고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 문명간의 충돌의 역사를 먼저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유럽의 어디를 가보더라도 이러한 문명의 충돌 역사 속에 현재가 이어져 가고 있었다.

따라서 로마의 몰락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있었던 기독교 세력들이 711년경부터 시작된 이슬람 세력의 침공에 밀려 비옥한 남부를 빼앗기고, 북부로 밀려나고 나서 다시 이들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축출하기 위한 레콩키스타(실지회복) 재정복 전쟁이 800년에 걸쳐 치러졌던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를 먼저 이해하여야 했고...  

그리스와 페르샤 간의 전쟁의 역사와 비잔틴제국 시절의 기독교 문명과 오스만 터키 마호멧 술탄에 의한 이슬람세력 간에 이어져 온 반전의 역사를 먼저 이해해야만이 유럽과 지중해 연안국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처럼 회사직원들 여럿이 함께하는 해외문화체험 기회를 가능하면 많이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번에 함께한 일행은 총 17명이었다. 9박10일간의 긴 여정 속에서 이처럼 많은 인원들이 한사람처럼 호홉을 맞추어 가며 일사불란하게 치루어 냈다.

이 얼마나 훌륭한 팀웍이었던가~! 이처럼 많은 인원들이 추호의 빈틈이나 착오없이 낮과 밤을 함께 움직일 수 있었다는 것은 동료직원들만이 가질 수 있는 큰 힘이다. 이러한 힘들이 네트워크가 되어 나갈 때 21세기 발전산업리더 위치에 서부발전이 당당하게 서게 될 것이다.

끝.